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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감각을 조형하다

by tatamama 2025.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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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는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이자, 설치미술과 혼합매체를 통해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한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시각뿐 아니라 청각, 촉각을 자극하는 그의 작업은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흐리며, 국제 무대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 이 글에서는 양혜규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조형언어, 재료 활용, 사운드 설치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조형 언어의 혼성성: 비물질과 물질의 경계에서

양혜규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혼성성(Hybridity) 이다. 그는 전통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무게감 있는 재료 대신, 흔히 쓰이지 않던 블라인드, 금속 프레임, 천, 인공 섬유 등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해 독특한 조형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 조형 언어는 직관적인 시각 미학을 넘어, 재료 간의 긴장감과 유기적 흐름을 통해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경계를 탐색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작업 시리즈인 "솔 르윗 뒤집기(Deriving Sol LeWitt)" 에서는 미니멀리즘의 기하학적 원칙을 차용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유기적 움직임을 병치하여 조형 언어의 해체와 재구성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관람객에게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감각적 충돌을 유도하며, 정형화된 미술 감상의 틀을 깨뜨린다.
양혜규의 조형 언어는 복합적이며, 철저히 경험 중심이다.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설치 구조, 빛과 그림자의 흐름, 그리고 공간을 지배하는 형태들은 감상자의 움직임과 시선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이는 그의 예술이 단순히 시각적 조형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적이고 관계적인 미학을 지향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운드와 움직임: 설치미술의 감각적 확장

양혜규는 시각 중심의 설치미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운드와 움직임을 작품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삼는다. 특히 모터가 장착된 블라인드 구조물은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설 때 자동으로 회전하거나 진동하며, 독특한 소리를 낸다. 이러한 사운드 요소는 공간 전체를 감싸며,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허문다.
그의 사운드 설치는 단순히 배경음이 아니라, 조형과 동등한 예술적 장치로 작용한다. 이는 양혜규가 ‘청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시각 중심의 미술 체계에 균열을 내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솔 르윗 뒤집기 – 보이지 않는 통로》 라는 작품에서는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모터 소리의 방향과 강도가 달라지며, 작품 전체에 살아 있는 듯한 ‘리듬’을 부여한다. 이 리듬은 전시 공간 자체를 악기로 변화시키고, 관람객은 그 속에서 하나의 '음표'가 된다.
이처럼 사운드와 움직임은 양혜규의 작품에 생명력과 유기성을 부여하며, 기존의 정적 설치미술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의 감각적 체험을 제시한다. 감상자는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작품과 공간, 사운드 사이의 인터페이스가 되어 예술을 완성해 나간다.

 

사회적 상징성과 비언어적 서사

양혜규의 작업은 형식적 실험을 넘어서,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탈경계성, 정체성, 여성성, 이주와 소외 등 현대사회의 복합적인 이슈를 작품 안에 은유적으로 녹여낸다. 그는 특정 사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비언어적 구조와 시각적 상징을 통해 관람객에게 사유할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민족의 전통 천을 엮어 만든 구조물은 세계화 시대의 이질적 문화가 얽혀 있는 현실을 상징하며, 커튼과 블라인드는 ‘가림’과 ‘노출’ 사이의 긴장, 혹은 공공성과 사적 공간의 경계 등을 암시한다. 양혜규는 이러한 상징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층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텍스트 없이 말하는 방식도 그의 주요 특징 중 하나다. 그는 제목을 제외한 작품 설명을 거의 배제하며, 관람객이 직접 의미를 구성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미술작품을 정보나 메시지 전달 수단이 아닌, 감각과 직관을 통한 사유의 매개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결국 해석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과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 열린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결론: 감각과 사유의 사이, 양혜규의 예술적 실험

양혜규의 작품 세계는 조형적 실험, 사운드 설치, 사회적 상징성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물질과 비물질, 시각과 청각,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예술 언어를 창조하고 있다. 관람객은 그의 작품을 통해 단순한 시각적 감상을 넘어, 감각과 사유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예술을 체험’하게 된다. 양혜규는 단순히 조형물을 만드는 작가가 아니라, 감각을 조형하는 예술가다.

 

양혜규 작품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수직공간에 설치된 양혜규의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출처: 한국일보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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