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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 단조의 미학과 한국적 리얼리즘 (서민, 질감, 일상성)

by tatamama 2025.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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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화려한 색채나 격정적인 붓놀림 대신, 단조로운 색과 투박한 질감으로 서민의 삶과 얼굴을 묘사했다. 특히 전쟁 이후 황폐해진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한국적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다. 이 글에서는 박수근의 작품 세계를 ‘서민성’, ‘질감의 조형성’, ‘일상의 시선’이라는 키워드로 분석하고자 한다.

 

서민의 삶을 그린 따뜻한 시선

박수근은 “나의 예술은 인간을 그리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그림에는 정치적 이념도, 영웅적인 인물도 없다. 대신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아낙, 아이를 업은 어머니, 돌을 줍는 사람 등 평범한 이웃의 모습이 중심이다. 이는 박수근이 자신의 예술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삶에 대한 애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빨래터》, 《시장》, 《노상》 등은 모두 서민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 모델이 된 이들은 실제 그의 주변 인물들이며, 그들을 신성한 존재처럼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왜곡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형태와 인체 비례는 그만의 사람 중심의 미학을 만들어냈다.
전쟁 이후의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박수근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선택했고, 이를 화폭에 담았다. 그는 극단적인 현실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소박하고 담담한 방식으로 시대를 증언했다. 이러한 시선은 한국 리얼리즘 미술에 있어 중요한 미학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조형미

박수근의 작품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캔버스 위의 독특한 질감이다. 그는 마치 돌벽을 연상시키는 화면을 위해 물감을 덧바르고 긁어내는 독창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단순한 미적 실험이 아니라, 한국의 흙, 벽, 땅의 감각을 재현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그림에는 일반적인 유화의 광택이나 부드러움이 없다. 대신 회색조를 바탕으로 한 화면 위에 인물과 사물들이 돌처럼 단단하고 평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 독특한 화면 구성은 현대적인 조형감각과 한국 고유의 미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박수근은 인물의 윤곽선을 단순화하고 반복함으로써, 형상보다는 전체적인 구조와 감정에 집중했다. 이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로도 평가되며, ‘형태의 단순화 = 감정의 깊이’라는 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의 조형성은 훗날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받으며, 박수근만의 독보적인 브랜드를 만들게 된다. 그가 구현한 ‘질감의 회화’는 지금까지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상을 예술로 바꾼 시선

박수근의 가장 위대한 점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순간을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그는 카페나 살롱이 아닌, 장터와 빨래터에서 예술의 가치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웃지 않지만, 울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잔잔한 감동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단지 회화적 주제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정서와 삶의 방식을 포착한 기록으로 기능한다. 박수근은 사진처럼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현실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는 ‘리얼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내리는 방식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다. 이는 그가 바라본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일상 속 감정의 깊이가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준다. 박수근의 시선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미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결론: 침묵 속에서 말하는 한국적 미학

박수근의 작품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는 소리 없이 시대를 말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삶을 존중하는 깊은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의 단조로운 색과 단순한 선은 오히려 더욱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한국 미술에서 박수근은 단순한 리얼리스트가 아닌, 삶 자체를 화폭에 옮긴 철학자이자 감성의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박수근 작품 빨래터

 

박수근, 빨래터,1954년,캔버스에 유채,15*31cm

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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